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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남 데 거리(거리 이름을 통한 베트남 역사)

교민지에서 발취한 글

by 하노이 수다장이 2009. 8. 2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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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남 데 (Ly Nam De) 거리

호완끼엄의 남쪽 호숫가에 위치한 항 카이 거리를 중심으로 서쪽 방향으로 유명한 짱티 거리가 있고

그 끝이 디엔비엔푸 거리와 만나는데, 이 지점의 약간 동쪽 방향으로 보면 리남데 거리가 보인다.

 

리 남 데(6세기)는 그의 조상이 왕망시대에 이곳으로 이주해 온 7대째 후손으로서 이미 베트남화 되어 있었던 사람이다.

리 남 데는 베트남의 토착지배층이 된 중국인으로서 베트남인의 마음을 휘어잡으면서 중국으로 부터 독립을 시도했던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중국에서 파견 나온 관리가 폭정을 일삼는 것을 보고 반란을 주도하게 되었는데,

이때 매우 유능한 찌에우 뚝이라는 베트남인 지방 토호가 가세함으로써 크게 힘을 얻어 중심역인 롱비엔 성을 점령하고,

그후 중국의 남북조시대때에 남조를 지배했던 양이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병사의 반 이상이 질병에 걸려 침입하는데 실패하고,

곧 이어 중부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럽읍(참파족)이 북베트남을 침략해 왔으나 리남데가 그들을 막아냄으로 또 한번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남과 북으로부터 침입을 막아낸 리남데는 국내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국의 정치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체제를

갖추어 나갔으며, 544년 그는 자신을 남 비엣(Nam Viet)의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반 쑤언(Van Xuan)이라 했다.

그리고 롱비엔 성을 도읍으로 하여 궁궐을 짓고 봉기에 함께 가세한 베트남인 찌에우 뚝을 태부로 임명하는 등

이와 더 불어 정사를 돌봄으로써 반 쑤언은 중국계 토착지배층(리 남 데)과 순수한 베트남인 토착세력(찌에우 뚝)의

결합에 의해 이뤄진 나라라 볼수있다.

 

오랫동안 베트남을 지배해온 중국은 새로이 출현한 베트남의 자주독립국가를 인정하지 않았고,

리 남데는 중국의 원정군과 2년간의 싸움 끝에 패하여 베트남 독립의 꿈이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믜는 무엇보다 베트남의 중국으로부터 독립시도가 단순히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독립이라는 점이다. 즉, 리남데는 자신의 원래 이름인 리본(Ly Bon)에서

자신의 성인 리에다가 남쪽의 황제라는 뜻인 남데를 부쳐 자칭 리남데라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한에 저항하기 위해 남 비엣(Nam Viet, BC 207- BC111)을 세우면서

스스로 황제라 칭했던 찌에우 다의 선례를 따른 것이다.

 

두번째로,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면서 수도를 롱비엔(Long Bien)인 오늘의 하노이로 확정한 점이다.

이것은 베트남의 두번째 왕국인 어우락을 세운 안즈엉 브엉의 국통을 다시 찾으려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또한

홍하델타의 전총문화를 계승하여, 나중에 리 타이 또가 탕롱(하노이)에 수도를 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리남데가 세운 만춘제국(AD 541- 547)은 아니러니하게도 5년의 단명으로 끝났지만

그가 시도한 자주독립정신은 후에 베트남 독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오늘날도 베트남인은 여전히 리 남데의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고 있고,

전국에 수백 개의 리남데의 사당이 세워져 있는것이 그의 높은 위상을 입증해 준다.

 

베트남 허브 중에서 발취

 

매번 느끼는 거지만, 위와 같이 베트남의 거리 이름들에 담긴 뜻과 그 뜻을 기리는 베트남인들의 마음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한 그 마음을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고 기린다는 것을 볼때 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베트남사람들의 정신을 좀 본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일까. 협동이 잘되는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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